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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과기부의 R&R이 궁금하다


#1.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지난 6월28일 2020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규모를 올해보다 2.9% 증액 의결했다. 당시 주요 정책분야들은 모두 조금씩 예산이 늘었지만 소재·부품·장비 분야는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오히려 올해보다 2%정도 삭감된 것이 소·부·장의 처지였다. 하지만 불과 며칠 뒤 일본의 對韓 수출규제 사태가 발발하면서 상황은 정반대로 뒤집어졌다. 기획재정부는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한 대응을 이유로 내년도 R&D예산을 올해보다 17.3%나 늘렸고 특히 소재·부품·장비 분야는 자문회의 의결안보다 무려 112.3% 늘어난 1조7천2백억원 규모로 편성했다.

#2.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10월2일 국정감사를 위해 국회에 제출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업무현황'에서 소재·부품·장비를 과기정통부의 최우선 업무로 내세웠다. '주요업무 추진계획'의 맨 앞 자리에 '소재·부품·장비 자립역량 확보'를, 주요 현안 첫 번째 과제도 '소재·부품·장비 R&D 투자확대와 성과관리 강화'를 적었다. 올해 초 발표한 '과기정통부 2019년도 업무계획'에는 소·부·장의 소짜도 없었던 것에 비하면 가히 혁명적인 변화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국가연구개발사업 추진체계상 최상위 기구다.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안은 '과학기술기본법'에 따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각 부처의 예산요구서를 검토·심의하고 이를 배분·조정해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의 심의를 거쳐 기획재정부에 제출하는 체계로 이루어진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가 의결한 예산안을 기획재정부가 다시 조정하는 일이 해마다 반복되면서 과기자문회의 무용론이 늘 대두되지만 올해만큼 심각한 적은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기재부가 추가 편성한 예산은 수백억원대였지만 올해는 무려 2조6천6백억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이 추가 편성됐다. 하지만 일본의 수출규제 대응이라는 명분에 밀려 별다른 문제제기없이 넘어가는 모양새다. 법적으로 R&D예산을 과기자문회의를 거치지 않고 편성하는 것은 문제라는 국회의 지적 때문에 정부 예산안 국회 제출 시한을 며칠 앞둔 8월28일 과기자문회의가 다시 수정된 예산안을 의결하기는 했지만 2조6천6백억원을 제대로 심의했을지는 의문이다.

급박하게 전개된 일본과의 무역전쟁 분위기 속에서 국가연구개발예산을 촉박하게 증액 편성한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치더라도 과기정통부가 국감 업무현황 자료에서 스스로 최우선 업무를 '소재·부품·장비'로 내세운 것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제조업 주무부처도 아닌 과기정통부가 소·부·장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 것은 중기부가 DNA(Data, Network, AI)를 정책추진방향의 첫번째로 내세운 것과 비견될 만한 정체성 혼란의 현장이라 할 만 하다. (DNA고도화는 원래 과기정통부의 최우선 업무 아니었던가?)

일본의 도발로 시작된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라는 과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기회에 그동안 모양만 그럴 듯 했던 R&D혁신 정책이 제대로 된 정책기반과 관련 주체들의 인식전환을 바탕으로 단단하게 뿌리내리기를 희망한다.

사실 6월28일의 과기자문회의 예산안에서 소재·부품·장비는 주요 정책분야에 포함되지도 않았었다. 따로 집계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예산이 2% 삭감된지도 모르고 지나갔을 수도 있다. 사태가 터지고 난 뒤 소부장을 주요 정책분야에 넣어 집계해보니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동안에 삭감돼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7월 이전까지만 해도 과학기술정책의 주요 의제에 소·부·장은 끼지도 못했던 이슈였다. 이번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은 '자율과 책임의 과학기술 혁신 생태계 조성'이라는 국정과제 아래에 '국가 R&D 혁신 가속화', '연구자 중심의 도전·혁신적 연구 강화', '기초·원천연구 지원으로 미래역량 확충', '자율·창의적 연구환경 조성' 같은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궁금한 것은 하나다. 소부장 대책이 실효성 있는 정책인가 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기초과학 육성을 비롯해 중장기적인 과학기술기반을 닦고 국가 미래를 준비하는 것을 주임무로 하는 부처의 역할과 책임(R&R)이 이렇게 유행따라 가볍게 바뀌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다. 국가주도의 추격형 R&D에서 탈피해 자율과 창의를 중시하는 연구자 주도의 도전·혁신적 R&D 체계를 만들겠다던 국정과제는 허울뿐이었던 건가?

기재부가 전년대비 17.3%늘어난 R&D예산안을 짜면서 13개 주요 정책분야 대부분이 자문회의안 대비 두 자리수의 증액 예산안을 받게 됐지만 '연구자 주도 기초연구' 예산만 3% 증액에 그친 것도 시사하는 바 크다.

산업육성을 담당하는 부처가 긴급한 통상환경 변화에 대응해 위원회·위원회·위원회를 만들고 긴급 예산을 편성하고 특별법을 제정하는 와중에서도 중장기적인 전략으로 기초를 중시하고 인기가 없어도 필요한 정책을 꾸준히 추진하는 부처가 한 곳 쯤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최상국 기자 skchoi@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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