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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13' 이야기…어느덧 '유럽 7년차' 구자철


애초에는 포지션 구분 위한 것이 이제는 '상징성' 띄기도

[조이뉴스24 김동현기자] 축구에서 등번호는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초창기 축구는 '포메이션'에 구애받지 않고 공을 따라가는 형태, 그러니까 전원이 공을 쫓는 (문자 그대로의) 토털 풋볼이 주류를 이뤘다. 포메이션 그리고 포지션에 대한 구분이 없으니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역할 또한 애매모호했다. 오프사이드도 없었다.

하지만 1866년 아웃 오브 플레이, 즉 현재의 오프사이드의 원형이 되는 룰이 제정된 이후 수비와 공격의 구분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당시의 오프사이드 전술은 지금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골 라인에서 패스를 받는 선수 사이에 상대 선수가 무조건 3명 이상 존재해야했다.

공격과 수비가 나눠졌다곤 했지만 '오프사이드'에 걸리지 않기 위해선 상당한 숫자의 선수들을 전진 배치시켜야 했다. 이때문에 수비수 두 명을 두고 미드필더 3명, 그리고 공격수 5명을 두는 이른바 2-3-5 포메이션이 주류를 이뤘다.

이 2-3-5 포메이션이 생기면서 선수들을 구분해야 하는 필요성이 대두됐다. 그래서 골키퍼에겐 1번을 주고 순차적으로 등번호를 배분했다. 이를테면 수비수 두 명이 2번과 3번, 일자 형태로 선 미드필더를 좌측부터 4~6번을 주고 공격수 5명에게도 마찬가지로 좌측부터 7~11번까지를 배분했다.

이것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등번호의 역사다. 센터포워드에게 주어졌던 9번은, 현대에 이르러선 폴스 나인, 즉 가짜 9번이라는 새로운 전술에 붙이는 이름으로까지 이를 정도로 영향을 미쳤다. 10번, 즉 센터 포워드 바로 옆에서 볼을 배분하던 역할의 선수들은 보다 세분화된 포지션으로 불리우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창의적인 선수에겐 등번호 10번을 주는 것은 관례처럼 굳어져있다.

◆ 이종갑부터 박지성…등번호 13의 역사를 이어받은 구자철

한국축구 팬들의 머리에 가장 확실히 남은 등번호는 '13'일 것이다.

1954년 국제축구연맹(FIFA) 스위스 월드컵에서 고 이종갑 선생이 13번을 달고 처음으로 국제 무대에서 뛴 이래로 13번은 근성있고 공을 잘 차는 선수들의 전유물이었다.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뛴 적이 있는 김진국이 70년대 등번호 13번을 달고 뛰었고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선 노수진,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선 정종수가 달았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선 현재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는 신태용 감독이 등번호 13번을 달았고 1998년 프랑스 대회 때는 김태영 현 수원 삼성 코치가, 그리고 2002년에는 왼발 프리킥으로 한국을 두 차례나 웃게 만든 이을용이 13번을 달았다.

결정적으로 13번이라는 숫자를 각인시킨 것은 바로 박지성이다. 지난 2005년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면서 그가 받은 등번호가 13번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7년간 뛰었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 속에 한국 축구를 새긴 전설적인 선수로 남아있다.

이후 한국 축구에서 유럽으로 가는 선수들은 부쩍 13번을 많이 선택했다. 제2의 박지성으로 불리던 김보경(가시와 레이솔)이 카디프시티로 이적할 당시 받은 번호도 13번이었고 윤석영(가시와 레이솔)이 퀸즈파크레인저스에 입단할 때 받은 번호도 13이었다.

그리고 현재 팬들에게 가장 인상깊은 13번은 누가 뭐라고 해도 구자철(아우크스부르크)이다. 마인츠에서도 국가대표에서도 13번을 달고 있는 그다.

지난 2007 K리그 신인 드래프트에서 3순위로 제주 유나이티드의 유니폼을 입은 그는 K리그를 대표하는 중앙미드필더였다.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부터 공격수 바로 밑에 위치하는 공격형 미드필더까지 두루 소화할 수 있는 선수로 각광을 받았다.

2008년에는 동아시아 축구선수권을 통해 A매치에 데뷔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19살에 불과했다. 역대 최연소 A매치 데뷔 8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2010년에는 박경훈(현 성남FC) 감독의 지휘 아래 제주가 리그 준우승을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베스트일레븐과 도움왕을 차지하며 훨훨 날았다.

이후 볼프스부르크의 러브콜을 받아 유럽으로 처음 건너갔는데 이때 달았던 등번호는 18번이었다. 공교롭게도 구자철은 볼프스부르크에서 별다른 활약하지 못했다. 등번호 때문만은 아니었다. 펠릭스 마가트 감독은 그를 윙포워드로 사용하는 등 '잘못된 활용법'을 펼쳤다.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었던 그였다.

이후 기회를 찾아 떠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1시즌 반동안 성공적인 시즌을 보내면서 입지가 달라지는가 싶었지만 여전히 볼프스부르크에서는 설 자리가 없었다.

그러다 발길이 닿은 곳은 마인츠05. 여기서 구자철은 등번호 13번을 받고 뛰었다. 초반에는 부진했지만 2014~2015시즌엔 독일 진출 이후 최다 득점인 7골을 터뜨렸다. 이듬해 아우크스부르크로 이적한 뒤엔 등번호 19번을 배정받았지만 팀의 주축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을 이어나가고 있다.

클럽에서보다 국가대표에서의 13번 구자철이 팬들에겐 더욱 낯익다. 그는 2012년 이후 꾸준히 13번을 달고 국가대표에서 뛰고 있다.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등번호 13번을 달고 뛰었고 2015 호주 아시안컵 당시에도 13번을 달고 팔꿈치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한국의 준우승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13번을 달면서 국가대표의 중심 축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변이 없다면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도 등번호 13을 달고 뛰는 구자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전망이다.

조이뉴스24 김동현기자 miggy@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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